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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와운의 아침단상] 거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이라고? -대한민국 세운 건국영웅 김성수를 기리는 판소리 책 출간! -6.15 남침 불발에 그치게 만든 요인 중 하나 농지개혁에도!

운영자 | 기사입력 2023/07/20 [13:28]

[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와운의 아침단상] 거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이라고? -대한민국 세운 건국영웅 김성수를 기리는 판소리 책 출간! -6.15 남침 불발에 그치게 만든 요인 중 하나 농지개혁에도!

운영자 | 입력 : 2023/07/20 [13:28]

 

산베고 누운 구름 

<>거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이라고? 

-대한민국 세운 건국영웅 김성수를 기리는 판소리 책 출간! 

-6.15 남침 불발에 그치게 만든 요인 중 하나 농지개혁에도!

 

 

올 3월, 인촌 김성수의 삶을 판소리와 희곡으로 만든 책이 출간됐다. 

제목은 ‘건국영웅’(춘추관 발간)! 

장편 ‘하의도’를 쓴 김남채 작가가 인촌의 삶을 소재로 펴냈다. 

인촌이 평생 실천한 좌우명 '공선사후, 신의일관'은 동아일보 편집국 벽에도 붙어있다. 

"공선사후를 신조로 민족 산업과 언론, 교육에 자산을 과감히 투척했다”(김남채) 

그는 "판소리로 인촌의 진가를 알리고, 연극 무대에 올리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173쪽 책은 판소리와 희곡 2쟝르로 돼있다. 

첫 대목은 인촌이 필생의 지기인 고하 송진우와 함께 일제 때 도쿄로 가는 장면이다.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서 시작했다. 

 

“나라 앞날이 걱정이다”는 말을 남기고 타계하기까지 인촌의 일대기를 책은 압축했다. 

희곡은 광복 이후를 다룬다. 

“인촌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책 제목을 '건국영웅'이라고 붙인 이유다. 

전북 고창 출신의 인촌은 일제 때 경성방직을 설립한다. 

이어 고하 등과 함께 기미년 독립운동 후 일제가 유화노선을 걷자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앞서 중앙고보·보성전문(현 고려대)을 인수한다. 

언론을 비롯한 사업과 인재 양성의 교육에 몸을 바친 데 이어 해방 후 한민당을 창당한다. 

 

이시영 선생에 이어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인촌의 건국정신은 농지개혁 단행과 제헌헌법 기초 과정에서도 오롯이 빛을 발한다.  

인촌은 UN 감시 하 자유 총선거로 한반도 문제 처리가 가닥을 잡자 정부수립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한다. 

 

유진오 박사에게 헌법초안 작성을 의뢰한다. 

 

반만년 간 헌법이 없던 나라에서 헌법을 제정한다는 건 혁명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 공법학자 유진오는 각국의 헌법 제도와 임정 헌법, 약헌, 강령 등을 두루 살핀다. 

 

한국 실정에 맞는 헌법초안을 윤길중 등 전문위원들과 협의하면서 다듬고 기초했다. 

 

초안의 마무리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하나는 대통령제냐, 내각제냐의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명시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정부형태야 윗물들만의 관심사다.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건 그야말로 뜨거운 이슈다. 

 

다수의 농민이야 찬성할 테지만, 소수지만 강력한 지주들의 반발이 그믐밤 불빛이다. 

 

농지개혁 방법과 소유 내용, 한계를 법률로 정한다는 규정을 헌법에 넣느냐의 문제다. 

 

인촌 가문의 농지소유 면적은 3247정보였다. 

 

조선에서 가장 넓은 농지 소유주가 바로 그다.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하자는 헌법 조항은 중대한 사유재산 침해다. 

 

지주계급의 반발은 물론, 법리적으로도 논란이 첨예할 수밖에 없다.  

 

제2차세계대전 후 시대의 요청으로 필리핀과 브라질도 농지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사유재산 침해를 이유로 지주들 반대가 극렬해서다. 

 

그 선례들로 미뤄볼 때 농지개혁이야말로 건국이 몰고 온 최대의 변혁이 아닐 수 없다.  

 

개헌절 75주년 때 서울 종로 북촌의 인촌 고택에서 인촌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우리가 모인 이 사랑채에서 유진오와 김성수는 요담을 나눴다. 농지개혁 없이는 공산당의 무상몰수 부상분배를 선전하면서 농민들에게 파고드는 공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진오는 인촌 선생에게 농지개혁조항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건의했다."(이영일) 

 

아무리 인촌이 마음이 넉넉한 대인배라도 결단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울산 김씨 인촌 가문이 소유한 3247정보의 농지 가운데 3정보만 남긴다. 

 

3244정보는 증권을 받고 국가에 넘긴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한다면 참으로 희생적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희생을 쉽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촌은 숙고 끝에 제의에 동의한다. 

 

인촌의 동의는 바로 한민당의 동의였다. 

 

전체 지주세력 동의를 끌어낸 기폭제이기도 했다. 

 

참으로 살신성의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5일 제주포럼에서 한 강연 때도 인촌 상찬이 불꽃을 튀겼다. 

 

강연은 사이버공간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요지는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은 1950년 이승만 정부의 혁명적 농지개혁이 디딤돌이라는 거다.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이 땅을 갖게 됐다. 

 

일부 대지주가 기업인으로 변신,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닦게 되는 선순환의 혁신이다. 

 

"국가 정책은 '선한 의도'가 아닌 '선한 결과'가 중요하다"(한동훈) 

 

한동훈은 역시 머리가 좋다. 

 

말도 논리적으로 단디 한다. 

 

가장 큰 위기 요인으로 인구 감소를 그는 꼽았다. 

 

출산율 회복만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다. 

 

"이민과 다문화 정책에 해답이 있다"는 처 방은 옳다.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여 경제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 

 

우남과 인촌, 죽산의 결단으로 단행된 농지개혁에 상응하는 이민정책 개혁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한동훈은 밝혔다. 

 

한동훈의 강연이 보도된 후 많은 네티즌들이 전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댓글을 달았다. 

 

법무부는 공식 유튜브채널 '법TV'에 이를 공개했다. 

 

한 인터넷 매체가 이를 공들여 풀어냈다. 

 

“경제성장 이끄는 법무행정과 기업의 역할”이 제목이다. 

 

아무튼 인촌의 희생적 결단이 없었다면... 

 

건국 후 농지개혁은 순산이 불가능했으리라! 

 

인촌은 동아일보 지면으로도 농지개혁을 도왔다. 

 

그에게 친일 꼬리표를 붙이려 드는 좌파세력들! 

 

'인촌의 희생적 결단인 농지개혁을 못했다면...' 

 

만일 그랬다면, '북의 남침 때 남로당 지하조직의 선동이 먹혀 한반도 적화가 성공했을 텐데...' 

 

그런 망상에서 '친일'로 낙인을 찍은 건 아닐까? 

 

물론 내가 너무 비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이승렬은 2년 전, '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그물)을 펴냈다.  

 

800쪽이 넘는 대작이다.  

 

나는 여지껏 그 책을 독파하진 못했다. 

 

저자 이승렬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이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좌파 계열이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으로 인촌 고하를 비롯한 '호남개혁지주' 계급을 꼽는다. 

 

전라도의 남과 북이 만나는 줄포항 주변에서 났다. 

 

이곳의 크고 작은 지주 가문 출신들이 인촌과 고하, 근촌 백관수, 가인 김병로 등이다. 

 

이들은 인촌의 장인 고정주가 설립한 소학교에서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운 바 있다. 

 

고정주는 호남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순국한 참 애국자다. 

 

60 노구를 이끌고, 칼 한번 잡아보지 못한 먹물 선비가 의병장을 했다. 

 

그의 11대 직손이 조선 말기에 규장각 직각(국립도서관장)을 지낸 고정주.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깜빡이다 마침내 일제의 손아귀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낙향한다.  

 

향리 담양에서 호남의 준재들을 가르친다. 

 

고 직각의 가르침으로 눈을 뜬 인촌 고하는 신학문을 배우러 일본에 함께 가게 된다. 

 

좌파가 친일 낙인을 찍었지만 중국 일본도 이루지 못한 자유주의 기초를 세운 주역이 고하 인촌이다. 

 

책에서 이승렬은 좌파 세력들에게 소신을  꿋꿋하게 피력한다. 

 

'인촌을 필두로 한 부르주아지 2세대, 즉 시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하나는 앙시앙레짐인 조선의 관료제였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 정권이라고 못박았다. 

 

국민주권과 공화정치, 보편주의를 중시했다. 

 

두 가치가 결여된 민족주의는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국민과 민족을 분열시킨다.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변질된다는 일침을 가한다. 

 

필자는 3·1운동을 그 전환점으로 본다.  

 

그때 싹 틔운 국민주권과 공화정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고 본다. 

 

3.1운동은 태화관에 모인 33인만이 주역이 아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가오마담이었을 뿐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손에 치켜들다 숨져간 이름 모를 평민들이 참 주역이다. 

 

중앙고보 숙직실에서 밤마다 모의한 20대 청년들도 있다. 

 

미국에서 우남이 민족자결주의를 비롯한 국제 정세를 전했다. 

 

귀를 기울인 인촌 고하 설산 등이 일제 때 자금과 인력의 집산지였던 천도교 손병희를 비롯한 각계와 접촉한다. 

 

3.1운동의 산실 중 하나가 중앙고보 숙직실이라는 일각의 평가도 있다.    

 

건국 75년만에 일본을 능가할 정도로 경제뿐 아니라 문화예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한강의 기적'은 호남의 양식있는 지주계급이 초석을 놓았다. 

 

"동학운동 이래 농민 중심의 민족해방을 강조해온 민족주의 좌파 역사관은 설자리를 잃었다."(이승렬) 

 

백두혈통 운운하며 핵 무장으로 동북아 평화 안정을 위협한다. 

 

모험주의로 치닫는 3대 세습 북은 정치적, 도덕적 파산 상태다. 

 

민족주의 좌파 역사관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광경이 보인다. 

 

일제가 없었다면 위로부터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고 민족주의 우파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논리가 박약하거나 시대착오라고 필자는 반박한다. 

 

자본주의가 일본 식민지에 의해 이식됐다는 실증주의적 식민지근대화론도 비판한다. 

 

그 논리 대로면 일제 후 독재정치까지 정당화하는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란다. 

 

자민당 독주 일본과 좌-우가 정권을 교대한 민주국가 한국의 차이도 설명할 수 없다. 

 

'독재와 민주주의 기원'을 쓴 베링턴 무어에게 주목한 것이라고 한 후배는 진단한다. 

 

유럽사를 보면 이런 포인트가 명확하다는 거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집착한 프랑스는 내전과 전쟁에 시달린다. 

 

위로부터의 개혁에 주목한 독일은 전체주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영국이 홍역을 치르지 않고 민주주의를 구가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래도 위도 아닌 중상층계급(부르주아지)이 자유주의 개혁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사관이라면 동북아에선 중국이 프랑스를, 일본이 독일 노선을 좇았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은 무혈의 영국 발자취를 좇는 슬기를 발휘했다. 

 

그 중심에 인촌 고하를 비롯한 호남개혁지주들이 있었다.  

 

친일타령 하는 좌파 역사관을 논쟁으로 깨부숴야 한다. 

 

보수 정권의 대법원도 친일인명 사전을 겨냥한 인촌 가문의 재판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비겁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촌 가문은 인촌 서훈 박탈 무효소송을 대법원에 상고해 계속 다투는 중이다. 

 

건국영웅의 친일 매도를 좌파 정권 때 했다. 

 

인촌에게 씌운 그 낙인을 말끔하게 지우자!

 

 

#뱀발...한동훈 강연 소개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거의 유일한 국가입니다. 

 

저는 평소에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여기 계신 기업인 여러분들의 도전과 혁신,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업의 성장이 대한민국의 성장 그 자체였죠. 여기 계신 기업인들께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 산업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고비마다 정부의 결정적인 정책적 결정도 있었고 그것이 대한민국 발전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결코 질서 정연하지 않잖아요. 

 

그 혼돈 속에서 그 시대 속에서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인 방향을 잡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그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치와 정부의 역할이고 우리나라는 실제로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판단과 실천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박정희 정부의 중공업 정책, 의료보험 및 연금 제도 도입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통해서 세계 최빈국 수준의 ‘빈곤’을 해결하고, 복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과감하게 만들어 내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주력 수출 산업인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서 산업 구조를 고도화했죠.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체결도 결정적 순간에 정부의 과감한 결단의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시다시피 당시 한미FTA 체결에 반대하는 의견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2012년 한미FTA 발효 후 10년이 지난 지금 한미FTA는 우리나라를 세계 무역 순위 6위라는 무역 강국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결정적 정책들이 있었죠. 하지만, 저는 오늘 1950년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1950년의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이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더라도요. 만약 이게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다른 나라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될 무렵에 우리나라는 압도적인 농업국가였습니다. 

 

무려 전 국민의 77%가 농민이었으니까요. 

 

남한은 더더욱 그랬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나라가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농지 소유의 불균형과 소작농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농지가 농지 65%가 소장 농지였고, 전체 농가의 86%가 소장농이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농민, 즉 국민의 대부분이 소장농이었고, 대주주가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고요 신생 농업국가 모두가 마찬가지 상황이었죠. 

 

이런 시대적 난제에 대해서 이승만 정부가 내놓은 답이 바로 농지개혁이었습니다. 

 

대주주들이 소유한 농지를 소장농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해서 대지주를 없애고 국민 다수를 자영농으로 만드는 거였죠. 

 

지금 생각해 봐도 ‘현실적으로 그게 되겠어?’싶은데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요. 

 

이 농지개혁으로 수백 년 동안 지배 계급이었던 지주 계층이 한순간에 소멸하게 됐습니다. 

 

농업 국가에서 대지주, 대농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것도 폭동이나 소요 사태도 없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게다가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때는 테러와 암살이 횡행하던 폭력의 시대였잖아요? 

 

이후에 우리 역사에서 대지주와 소작농이 대립하고 갈등했다고 한번 가정해 보시죠. 

 

농민 게릴라가 아직도 있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처럼 말이죠. 

 

필리핀이나 브라질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농지개혁이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한 것이었는지 체감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 같은 나라는 대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한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것을 제가 지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국토가 넓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브라질이 아직까지도 빈곤한 이유는, 룰라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민국과 달리 농지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요. 

 

1950년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사실 제가 농지개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그때 그 기사를 보면서부터였어요. 

 

잘 아시다시피, 농지개혁은 이승만 대통령과 조봉암 농림부 장관이 설계하고 실행했습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공산주의 활동까지 했었던 조봉암 장관을 과감하게 중용해서 함께 농지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은 이 결정적 장면을 더 빛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의 역할이 있었긴 했습니다. 

 

전통적인 대주주들이 지주 입장에서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한번 상상해 보시죠. 

 

워낙에 헐값이기도 했지만 현금도 아닌 지가증권, 즉 국채로 땅을 사실상 강제로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잖아요. 

 

땅값은 오를 거고, 신생 국가의 국채는 신뢰할 수도 없었는데도 말이죠. 

 

지주들이 이런 파격적인 정부 정책을 수용한 것을 농지개혁의 성공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당시 대지주들이 농지개혁에 협력한 것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상황론이었다고 폄훼하기도 합니다만 농업 국가에서 대지주들이 신생 정부가 발행한 믿을 수 없는 지가 증권을 받고 땅을 내준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비슷한 농지개혁을 시도했던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대지주들이 어떻게 개혁에 저항하고, 아직까지도 대주주들이 건재한지를 한번 생각해봐주시죠. 

 

말이 나온 김에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 성공한 비결을 알기 위해서 당시 농지개혁 제도의 디테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이 있다고 하잖아요. 

 

여담입니다만, 여기 계신 기업인들이야말로 디테일의 장인들이시고 정부도 그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농지 개혁 방안의 핵심은 디테일은 ‘낮은 매입 가격’과 ‘분할 상환’에 있었습니다. 

 

소작료가 당시에 50%에 달했는데, 그 시절에 1년 소출의 30%씩 5년만 납부하면 토지의 소유권을 완전히 취득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거든요. 

 

이런 조건이니까 당연히 이 매입 권한을 포기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죠. 

 

원래 내던 소작료보다도 적게 5년만 내면 그냥 내 땅이 되는 건데 이걸 왜 포기하겠습니까? 

 

농민들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고, 이런 조건 때문에 이 농지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들 합니다. 

 

농지개혁은 6.25 전쟁 직전 대부분에 마무리 됐는데요. 

 

북한의 침략에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6.25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며칠 내로 대한민국의 농민과 좌익세력이 북한군에 호응해서 폭동을 일으켜 줄 것’이라고 호언 장담을 했었잖아요. 

 

결국 이 말은 허언이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을 이 농지개혁 덕분이라고 얘기합니다. 

 

대부분의 농민이 ‘내 땅’을 가지게 됐고, ‘내 땅’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기대하게 된 상황에서 농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나라를 지키게 된 거죠. 

 

아시다시피 그 결과 6.25 전쟁 과정에서 북한의 체제 선동은 별 효과를 보지도 못했고, 북한군의 침략에 호응하는 대규모 농민봉기도 물론 없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농지개혁으로 우리나라에서 대지주 계층이 소멸하게 되니까 이제 농지개혁으로 생긴 그 여백과 진공의 공간에 기업인들의 활동무대가 열렸습니다. 

 

토지를 잃은 기존 대지주들은 물론, 저렴하게 할인 유통되는 지가증권을 이용해서 적산기업의 생산 설비를 취득한 젊은 기업인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산업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한거죠. 

 

광복 직후 우리나라 산업 구조를 보면 농업 등 1차 산업의 비중이 가장 높았지만, 그 이후에 농지개혁 이후에는 1차 산업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지고 제조업ㆍ공업ㆍ서비스업 등으로 산업이 고도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증적으로 봐도 농지개혁이 우리나라 고도 산업화의 첫 발걸음이었다는 것은 입증됩니다. 

 

1950년에 이걸 할 때 이것까지 다 계산하고 만든 정책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과가 분명히 그랬습니다. 

 

정책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선한 결과’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농지개혁이 ‘만석꾼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을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최종현 회장과 같은 여러분들의 선배 기업인들이자 대한민국의 영웅들이 혁신을 실현하고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기업인의 나라’로 바꾸는 대전환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토지분배와 경제성장률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 그래프는 2003년에 세계은행에서 발간한 자료인데요. 

 

저는 주대환 선생님이 쓰신 책을 읽다가 이 그래프를 처음 봤습니다. 

 

보시기에 좀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그래프를 보시면 196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토지 분배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였던 것이 확인됩니다. 

 

대만, 일본 등 토지 개혁을 이루었던 나라들이 토지 분배에 있어서 불평등 지수가 낮은 것도 확인할 수 있죠. 

 

이 그래프는 초기 토지분배의 평등도와 장기 성장률의 관계를 보여주는데요. 

 

이 두 지표가 거의 정비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도, 실증적으로 봐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의 과감한 토지 농지개혁과 분배 정책이 우리나라 장기 경제성장의 토대를 만든 ‘백년대계’가 된 겁니다. 

 

반대로 농지 개혁에 실패해서 여전히 대지주 위주의 농장경제에 머무른 나라들은 경제성장에 실패했죠. 

 

페루,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라과이 등 중남미 국가들을 비롯해서 토지 소유가 대지주에 집중됐던 국가들은 40여 년 동안 거의 성장하지 못했거나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오랫동안의 역사를 하나의 통계로 설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의미 있는 지표인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광복 직후 우리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 등 내부적 혼란뿐만 아니라 6.25 전쟁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그럼에도 정부는 과감한 제도 개혁으로 사회와 경제 발전을 위한 제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조봉암 장관의 박력 있고 정교한 리더십이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농지개혁처럼 지금의 우리 정부도 제도를 개혁하고 사회 구조를 개혁해서 국민 여러분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만들고, 바로 여러분들 같은 기업인들이 자유롭게 창의와 혁신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기업인들을 시장 외부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는 단호하게 보호하고, 시장 내부의 ‘룰’은 반드시 지켜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 정책의 핵심일 겁니다. 

 

우리 정부는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시장경제 활성화’를 국정 과제에첫 번째 목표로 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의지이고, 저도 같이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1950년 농지개혁에 대한 생각을 좀 길게 말씀드렸습니다만, 다 아시는 얘기였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부의 결정적인 올바른 정책적 결정이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정부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제 70년이 지난 2023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어려운 도전들과 맞서고 있잖아요. 

 

여기 계신 기업인들께서 그 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경제 지표상으로는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이라는 복합 위기를 겪고 있고, 인구감소, 기후변화, 코로나19 같은 문제로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죠. 

 

EU 등에서 기업에 대한 인권과 환경 기준을 높여가고 있고요. 

 

특히 최근에 미-중 관계에서 보듯 경제와 안보가 융합되어 가는 경제 안보 시대에는 정부와 기업이 국제관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정부 따로 기업 따로가 불가능한 시대가 됐죠. 

 

지금 부산 엑스포를 위해서 우리 최태원 회장님께서 다리가 이렇게 아프신데도 열심히 뛰시는 것처럼요. 

 

이를 위해서 정부와 민간 모두의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정부의 입장에서는 미래를 예측하고 민간의 기업 활동과 경제활동을 적시에 지원할 수 있는 제도와 인프라를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겁니다. 

 

1950년의 놀라운 농지개혁이 그랬던 것처럼요. 

 

저는 가장 시급하게 대비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인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도는 소멸 고위험 지자체에 해당하는 시군구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지금은 일부 지역만 해당하지만 2047년이 되면 지금 바로 이곳 제주 서귀포시를 포함해서 전국 대부분의 지방 도시가 소멸 고위험 지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는 인구를 감소시키고, 그 결과 노동력 부족을 야기하며, 수요와 소비의 감소로 우리 경제와 사회 전 분야에 굉장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겁니다. 

 

여러분들 모두 걱정하다시피요. 

 

이건 서울대학교 인구정책연구센터의 자료인데요, 2021년과 2100년에 우리나라 인구추계를 보여주는데 2100년이 되면 저출산으로 인하여 총 인구가 2000만 명 이하로 줄어들 뿐 아니라 15~64세 생산가능 인구보다 노인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겁니다. 

 

순수 한국인의 인구 구조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이건 이미 바꿀 수 없는 미래입니다. 

 

산수 계산상으로도 이걸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내국인의 자체 출산율 증가만으로 이 추세가 바뀌기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대로 두면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업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며 우리나라의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여러분들께 특히 심각한 상황일 것 같습니다. 더 체감하실 거고요.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구 감소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되겠습니까?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제가 올 초에 이민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정책 책임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정답이 뭔지 한번 물어봤습니다. 

 

사실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그 누구도 지금 시점에서 정답을 모릅니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나라조차 없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는 순간 진짜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70년이 지난 지금 1950년에 농지개혁이 정답이었다고 말할 수 있듯이 10년 뒤 50년 뒤 70년 뒤를 돌아봤을 때 지금 우리가 2023년에 정답을 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국인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정부가 여러 가지 정책을 하고 있잖아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나 이런 출산율 회복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출산율의 감소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젊은 친구들을 탓할 문제도 아니죠. 

 

게다가 이미 이렇게 인구수가 절대적으로 감소하는 상황에서 출산율이 좀 높아진다고 해서 다시 인구가 회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계산상 명백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다시 출산율이 드라마틱하게 높아진다고 해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생산 가능 연령까지 되기까지는 최소 15년 이상이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내국인의 출산율 증가만으로 인구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게다가 선진국에서의 출산율 감소는 전 세계적 추세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노력으로 해결될 것인지도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해결한 나라도 없잖아요. 

 

기업에서도 이런 인구 분석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품을 기획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시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기업인들이 이 현실과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출입국 이민 정책’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에 대해서 호감을 갖는지 반감을 갖는지와 별개로 사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길이 있나요? 

 

다른 길이 없다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방향이라면 국익 차원에서 ‘기획해서’ ‘강하게 그립을 쥐고’ 추진하자는 겁니다. 

 

먼저 경험한 나라들의 경험과 우리의 상상력을 결합하면 저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어업ㆍ농업ㆍ일부 제조업 분야의 인력 상당 부분을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그런데 ‘이민 정책을 하지 않는’ 선진국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체계적인 이민 정책을 준비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맞이한 현실은 ‘출산율 0.78’입니다. 

 

출산 연령 인구 자체가 좀 작아져서 분모가 작아지니까 이 숫자가 조금 높아져서 착시 현상이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출산 장려만으로 인구 절벽을 극복하기 늦었습니다. 

 

이제 체계적인 출입국 이민 정책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애써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우리는 선진국들의 각기 다른 실패담을 분석해서 지름길로 갈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5년, 10년 뒤에는 분명히 외국인들의 자발적인 기여를 활용하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서 피해를 볼 수 있는 내국인들의 불안까지도 꼼꼼히 챙기는 나라가 세계를 선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우리나라가 되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정말 이 시기를 놓치면 10년 뒤에 ‘왜 그때 너네 그런거 안 했어?’ 라고 원망받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방향을 정하고 체계적으로 신속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기업 차원에서도 회사 인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농지개혁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서 정부가 좋은 제도를 만들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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