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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와운의 아침 단상] 1, 나의 대부, 大文豪 최인호 10주기 꼭 보름 전, 추석 직전 9월 25일. 최인호 형 10주기 추모 행사를 놓쳤다.

운영자 | 기사입력 2023/10/09 [07:53]

[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와운의 아침 단상] 1, 나의 대부, 大文豪 최인호 10주기 꼭 보름 전, 추석 직전 9월 25일. 최인호 형 10주기 추모 행사를 놓쳤다.

운영자 | 입력 : 2023/10/09 [07:53]

 

와운의 아침 단상

 

1, 나의 대부, 大文豪 최인호 10주기

꼭 보름 전, 추석 직전 9월 25일.

최인호 형 10주기 추모 행사를 놓쳤다.

고인은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났다.

2013년 가을 침샘암으로 고생하다 별이 됐다.

17일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생일이다.

 

형과 첫 인연은 22년 전으로 거스른다.

지금 전업 작가인 권기태가 매파를 했다.

나는 권 후배와 동시에 국제부로 자원해 왔다.

법조팀장 계속 하다간 영어를 도저히 못할까봐. 

 

권 후배는 직전 문화부에서 문학담당을 했다.

그를 보니, 책꽂이에 소설책만 댕그라니였다.

그를 불렀다.

 

"영어 잘하나?"

"별로 입니다..."

"그런데 왜 책꽂이에 영어사전조차 없지?"

물론 국제부 공용의 영어사전이 두어권 있다.

여럿이 쓰다보니 낡고 헤어진 것들이다.

 

"..."(묵묵부답)

그를 내 자리로 불렀다.

NYT 사설을 찢어 30분 내 번역해보라 했다. 

NYT는 잘 난 척하는 코쟁이들이 타깃이다.

평상어가 아닌, 우리로 치면 라틴어에서 유래한 어려운 단어, 즉 고문들도 마구 쓴다.

 

그러니 사전을 봐도 참 이해하기 난삽하다.

30분 뒤 "갖고 와!" 해, 보니 개발 새발이다. 

소설책 3권을 압수하고 교보문고로 가 영어사전부터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 했다. 

압수품이 바로 대히트 한 '상도' 전질(3권)이다.

읽어보니 빠져들었다.

 

집에 갖고 가 밤늦게까지 3권 모조리 독파했다.

다음날 권 작가님을 다시 불렀다.

책을 돌려주면서 "최인호를 잘 알아?" 물었다.

"문학담당이라 조금 안다"고 했다.

농반진반으로 "1주일 내 (최인호와) 점심한번 만들어!"라고 했다.

다음 날, 9월 초(?) 모일이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영어는 못해도 이놈 마음에 드네!'라며 흐뭇해했다.

그게 최인호 형과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1주일 뒤 언주로 쪽에 있던 빌딩 2층으로 갔다.

김성봉이 대표인 여백 출판사 사무실로 말이다.

김성봉은 고 김재순 국회의장의 자제다.

그가 인호형 출판을 돌보는 매니저격이었다.

 

권작가의 안내로 작업 중인 그에게로 갔다.

"최영훈차장님 오셨습니다."

"응, 거기 좀 앉아 있어!"

딱 한마디를 얼굴도 보지 않고 툭 던졌다.

원고를 교정하는 작업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약간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최인호 정도라면 이 정도야! 상도도 공짜로 재미나게 읽은 참이기도 했으니...' 

그냥 참고 묵묵히 관찰했다.

다리를 꼬아 책상 위에 걸친 폼이 동아일보 편집국과 유사했다.

지켜보니 집중력은 대단했다.

최인호 글씨는 대단히 악필이다.

난필을 알아먹고 타자로 치는 이를 따로 뒀다.  

 

한 5분쯤 기다렸을까?

그가 교정본 원고를 누군가에게 건넸다.

"어이, 밥 먹으러 가지"라며 그제사 내게 눈길을 준다.

양 최의 두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는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그가 고집 센 '최'가에다 옥니, 곱슬까지 몹시 괴퍅한 인간일 거라는 선입견에 잡혔건만...

지금은 없어진 강남의 우래옥으로 가 불고기에 냉면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시시콜콜 내가 뭘 주로 취재했는지를 묻더니 자기 얘기를 주로 풀어놨다.

인호형은 초면인 내가 붙임성과 공감능력이 뛰어났던지 호감을 표했다.

그게 문제였다.

밥 먹고 나오다 공연히 쓸데 없는 소릴 내가 했다.

"저도 80년에 명동성당에서 예비자교리를...수녀님이 까칠해 하루 결석했다고 불러 '한번 더 빠지면 자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지 않고 "두어 번 더 빠질 텐데요"라고 응수했다. 

그러니 그 수녀가 눈을 크게 떠고 '안 와도 된다'고 해 그만...

길을 가던 중, 얘기를 나눴는데 갑자기 인호형이 멈췄다.

내 손을 꼭 잡더니, "(교리를)다시 하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뿔사!

 

'그냥 생각해보겠다'고 하지 않고 둘러댔다.

 

"아, 교리를 마치려면 6개월 걸리는데 저가 두어달 뒤 미국 연수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인호형이 재빨리 말했다.

 

"아 그건 괜찮아, 속성으로 주는 데를 알아!"

 

그렇게 인호형은 '나의 영원한 대부'가 됐다.

 

그때 소개받은 곳이 바로 장충동 성분도출판사 뒤 성바오로수도회였다.

 

인호형과 절친인 고 김형영 시인의 안내로 조광호 신부와 대면을 한 것은 1주일 뒤였다.

 

영원한 나의 신부님, 조광호 신부도 인호형으로 인해 연을 맺었다.

 

그때 혼배성사를 위해 가수 노영심이 영화감독과 두어번 교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에 끼어 두번인가 하고 수도회 뜰에서 열린 세례식에서 베드로 최영훈이 탄생했다.

 

가톨릭평신도회장이던 선배 김기수를 대부로 염두에 뒀다.

 

마침 그가 외유를 떠나게 되는 바람에 나의 팔목을 비틀고 인도한 인호형을 대부로...  

 

대부를 기꺼이 맡아주신 인호형 역시 베드로였다.

 

그는 1945년 10월 17일.

 

경성부가 서울로 바뀐지 두달 사흘 뒤 고고의 성을 질렀다. 

 

그리고 10년 전, 9월 25일 꼭 보름 전 타계했다. 

 

연세대 영문학과를 마쳤다.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18세, 서울고 2년 때 데뷔작이 당선된 거다.

 

수상식장에 나타난 교복 차림의 인호형.

 

신문사는 그제야 그가 고교생임을 알게됐다.

 

그의 이름만 내고 작품은 게재하지 않았다.

 

화재가 나는 바람에 그의 원고는 소실됐다.

 

첫 소설 육필원고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의 작품'이다.

 

9년 뒤, 군 제대 후 신예작가로 조선일보에 연재한 '별들의 고향'은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연재 당시 27세, 최연소 신문연재의 기록을 남겼다. 

 

주요신문 연재소설 작가는 아무나 못했다.

 

문단에서 호가 난 글쟁이들에게만 돌아왔다.

 

연재소설 제목은 당초 '별들의 무덤'이었다.

 

문학담당 데스크가 '조간신문인데 아침부터 무슨 무덤이냐!'며 고향으로 바꿔 버렸다.

 

'별들의 고향'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전국 술집 아가씨들이 너도 나도 이름을 주인공 '경아'(가명)로 고쳤을 정도다.

 

1973년 예문관에서 '별들의 고향'이 상하로 출판됐다.

 

나오자마자 당시 파격의 밀리언 셀러(100만부)를 기록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책 뒤표지 전체를 최인호의 얼굴 사진으로 채웠다. 

 

책 표지에 작가 사진이 게재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고교동문 이장호가 영화한 '별들의 고향' 메가폰을 잡았다.

 

당시로는 압도적인 46만 관객을 모았다.

 

OST는 인호형이 좋아한 악동 이장희가 맡았다.

 

별들의 고향의 명대사.

 

"경아,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신성일의 대사에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눈은 떨린다.

 

"아 행복해요, 꼭 더 껴안아주세요"

 

처음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경아.

 

천성으로 타고난 밝음과 명랑함으로 슬픔을 이겨낸다.

 

재력을 갖춘 중년의 이만준 후처로 들어간다. 

 

그러나 과거 때문에 이만준과도 헤어진다.

 

알콜 중독으로 결국 호스테스로 전락한다.

 

그러던 중, 사람좋은 화가인 문호를 알게돼.

 

그저 그렇고 그런 신파조의 멜로였지만...

 

탁월할 대사와 심리묘사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최인호를 3류 대중소설이나 쓴다는 낙인을 오래도록 찍히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이만총총(계속)

 

#뱀발...수상 기록

 

인호형과 인연을 한 서너번 연재할 예정이다.

 

2013년 제3회 아름다운예술인상 대상

 

타계 몇 개월 뒤 ‘아름다운예술인상’ 대상이 수여됐다.

 

재단법인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에서 3회 대상 수상자로 고인을 선정한 것이다. 

 

수상 이유로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장을 열었고, 10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영화로 제작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깊고 푸른 밤' 등은 관객몰이를 한 초대박 작품들로 70~80년대 한국영화사에 우뚝하다.

 

인호형과 안성기도 깊은 연으로 서로 아끼는 사이였다. 

 

함께 공로예술인상을 받은 윤일봉도 별들의 고향에 출연했다.

 

고 이어령 선생이 인호형에게 상을 주기 위해 애를 썼다고 들었다. 

 

모진 병마와 사투를 벌이면서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은 감투정신을 높이사서란다. 

 

사실인가?

 

하늘로 간 고 이어령 선생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은 바 있다.

 

2011년 제14회 동리문학상

 

2006년 제6회 연문인상

 

2006년 제5회 송산상 문화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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